17세에 광주일고 3학년으로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이끌며 대회 MVP로 뽑혔습니다. 18세에는 고려대 1학년으로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에 나가 한국의 우승을 이끌고 첫 MVP가 됐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해19세에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에서 미국·대만·일본전 승리투수가 되며 대회 MVP에 뽑혔고, 한국은 동양권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20세에는 미국에서 열린 한·미 대학 올스타 교류전에서 마크 맥과이어를 여섯 차례 상대해 모두 삼진으로 잡았습니다. 21세에 LA 올림픽 야구 시범경기에 대표팀 에이스로 나갔고, 이후 미국 구단들의 입단 제안이 이어졌습니다.
22세에 해태 타이거즈 입단을 둘러싼 소동을 거쳐 7월 2일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그해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습니다. 23세에는 24승 6패, 평균자책점 0.99로 정규시즌 MVP에 올랐습니다. KBO 최초의 0점대 평균자책점입니다. 24세 5월에는 최동원과 연장 15회 완투 대결을 벌였습니다. 27세에 세 번째 정규시즌 MVP를 받았습니다.
28세에 19승, 평균자책점 1.55, 탈삼진 201개로 투수 3관왕에 올랐고, 6월에는 한 경기 18탈삼진을 기록했습니다. 11월 한일 슈퍼게임에서는 5타자 연속 삼진을 잡았습니다. 30세에는 마무리 투수를 본격적으로 맡아 평균자책점 0.78로 KBO 한 시즌 최저 기록을 세웠습니다.
32세 11월 한일 슈퍼게임이 끝난 뒤 일본에서 뛰고 싶다고 밝혔고, 12월 주니치 드래건스 입단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33세에 주니치에 입단했지만 첫 시즌에는 평균자책점 5.50으로 부진해 2군에 내려갔습니다. 34세에 38세이브, 평균자책점 1.28로 되살아났습니다. 일본 프로야구 시즌 최다 세이브와 같은 숫자입니다. 35세에는 29세이브, 평균자책점 1.48을 기록했습니다. 36세에 주니치의 센트럴리그 우승이 결정되는 경기를 마무리했고, 그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습니다. 37세 3월에 은퇴식을 치렀습니다.
40세에 주니치에서 코치 연수를 했습니다. 41세에는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로 계약했습니다. 42세에 삼성 감독에 올라 첫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습니다. 43세에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습니다.
47세 12월 삼성 감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48세에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선수 시절을 보낸 팀에 16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51세에 KIA와 재계약한 지 5일 만에 감독직에서 자진 사퇴했습니다. 54세 7월에 야구 국가대표 첫 전임감독이 됐습니다. 55세에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선수 선발 논란이 이어졌고, 11월 감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56세에 뉴욕 양키스 스프링캠프 연수를 발표했습니다. 57세에는 코로나19로 연수 계획이 멈추자 일간스포츠에 「선동열 야구학」을 연재했습니다. 59세에 KBO 리그 40주년 레전드 40인 투표에서 1위에 올랐습니다. 61세에는 제15회 선동열배 농아인야구대회 본선에 참석했습니다. 62세에 일간스포츠와 주니치신문의 공동 인터뷰에 응했고, 16회째 농아인야구대회에 참석했습니다. 63세에 제17회 선동열배 대회장을 맡았고, 8월에는 주니치 레전드 이벤트 경기에서 시구했습니다.
선동열(1963년 1월 10일생)은 19세이던 1982년 9월 14일 서울 세계야구선수권 결승에서 한국이 우승했고, 대회 MVP에 오르며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22세이던 1985년 7월 2일 해태 타이거즈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23세이던 1986년에는 평균자책점 0.99로 정규시즌 MVP에 올랐습니다.
나이는 연도 기준입니다(그 해 − 출생 연도). 생일 전후를 따지지 않습니다.